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틴 보어만 (문단 편집) === 나치 정권의 숨은 실세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보어만.webp|width=100%]]}}} || ||<#ddd,#191919> 왼쪽부터 [[아돌프 히틀러]] [[퓌러]], [[한스 라머스]] [[슈츠슈타펠|SS]][[대장(계급)|대장]], 보어만 [[슈츠슈타펠|SS]][[대장(계급)|대장]]이다. || 당시 보어만은 주로 히틀러의 사생활이나 돈줄을 맡으면서 탁월한 업무능력을 인정받았다. 히틀러 집권 이후 결혼한 부부에게 '[[나의 투쟁(자서전)|나의 투쟁]]'을 2부 증정하게끔 해서 독일 내에서만 '나의 투쟁'을 천만 부 이상[* 해외까지 고려하면 수백만부가 더 팔렸다.] 팔아치우는 식으로 히틀러가 돈을 엄청나게 긁어 모으는 데 공헌한 것이다. 그 밖에 재벌들이 상납한 돈까지 관리하였기 때문에, '총통 전용' 시리즈인 별장, 미술품, 건축물, 그리고 히틀러의 애인 [[에바 브라운]] 용돈과 사치품[* 1942년부터 히틀러의 타자수로 일했던 [[트라우들 융에]]는 에바 브라운이 같은 옷을 입는 걸 본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보어만은 에바 브라운을 '마님' 모시는 돌쇠처럼 모셨지만, 정작 브라운은 말을 섞는 것조차 싫어할 정도로 보어만을 혐오하였다고 한다. 보어만 역시 에바 브라운을 현실감각이 없다고 사석에서 비웃었지만, 둘 다 서로 받아먹을 건 사양 않고 다 받았다.]은 모두 보어만의 돈 관리에서 나왔다. 히틀러는 대외적으론 나라에서 월급을 안받는다고 '선언'해서 청렴결백하고 솔선수범한다는 이미지를 얻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강제적인 저작권료/초상권료 징수, 대기업들의 뇌물, 미술품과 부동산 강탈, 탈세 등 여러방법으로 현재 가치로 무려 6조원에 해당되는 엄청난 재산을 긁어모았는데 이 모든 것을 보어만이 직접 진두지휘하였다.[* 독일 공영방송 [[ARD]]에서 <히틀러의 재산>(Hitler's Money)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는데, 여기에 이 과정이 상세하게 나온다. 2014년에는 스위스 비밀계좌에 히틀러 비자금 6조원이 숨겨져 있었다는 문서가 공개되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406262112045|“히틀러, 현재 가치 6조원 스위스 은행에 은닉”]].] 즉 히틀러의 금고지기였다. 1939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 1941년 5월, 부총통[* 부총통이라고 해서 별다른 실권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나치당 내에서만 총통의 대리인일 뿐이고 그마저도 진작부터 실권이 없었다.]이었던 [[루돌프 헤스]]가 비행기를 몰고 영국에 착륙하여 단독으로 강화 협상을 하려는 기행을 벌이다가 영국 당국에 체포된 일이 발생하였다.[* 헤스는 자신이 영국과 평화협정을 성사시키면 히틀러의 신임을 다시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히틀러의 승인없이 영국으로 Bf-110을 타고 갔다가 체포되었다고 한다.] 물론 헤스의 비서였던 보어만도 거기에 가담했던 것으로 의심을 샀는데, 보어만은 그 특유의 순발력으로 의심에서 빨리 벗어났다.[* 실제로 1941년 5월 11일 10시 경에 루돌프 헤스의 부관 두 명이 히틀러가 머물고 있던 오바잘츠베르크의 대기실로 허둥지둥 달려와서는 즉시 히틀러를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이때 그들은 히틀러에게 전하는 그의 상관 [[루돌프 헤스]]의 편지를 갖고 있었다. 그 두 명의 부관을 들어가게 했던 [[알베르트 슈페어]]는 히틀러의 집무실 문 앞에 서 있었는데, 슈페어가 증언하기를 그때 문 너머에서 갑자기 신경질적인 절규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남겨놓은 편지로 정황을 파악한 히틀러는 굉장히 분노했고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 히틀러는 헤스를 다시 만나게 되면 사형시키겠다고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때 히틀러는 그의 측근을 불러서 "보어만을 불러들여! 보어만은 어디있는 거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보어만을 찾았는데, 몇 분 뒤에 보어만은 비행기를 타고 사라져버린 루돌프 헤스를 비판하며 자신의 상관에 대해 반역자라고 욕설을 퍼부어댐으로써 자신은 헤스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재빨리 항변하는 데 성공했다.] 그 후 보어만은 헤스의 기행으로 공석이 된 당의장 자리를 차지하는 데 유리한 고지를 점하였으며, 결국 이 자리를 노리던 여러 유력인사들([[헤르만 괴링]], [[파울 요제프 괴벨스]], [[하인리히 힘러]], [[알베르트 슈페어]] 등등)과의 복잡한 당내 권력투쟁에서 승리하고 당의장 자리를 차지했다. 이때 보어만은 헤스가 갖고 있던 부총통 자리까지 넘겨 받으려 했지만, 헤르만 괴링을 비롯한 고참당원들이 보어만의 부총통 계승을 극력 반대했기 때문에, 결국 보어만은 부총통의 이름을 바꾼, 제국장관(Reichsminister)으로 임명되었다. 1943년 4월 12일에는 '총통 비서'의 직위까지 겸직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사실상 2인자 권력을 손에 넣게 된 보어만은 [[니트족|니트]] 생활의 히틀러가 꺼리는 서류작업을 처리하면서 호가호위를 할 수 있었다. 히틀러의 눈과 귀를 가리고 사실상 자신의 명령을 히틀러의 이름으로 내리게 되었기 때문. 격무에 신경쓰기 싫어하는 히틀러 자신도 성실하게 보이는 보어만에 점점 의존하게 되었고, 보어만 자신도 아첨에 상당히 능해서 히틀러에게 큰 신임을 얻었다. 히틀러는 행정에 대해 무능을 뛰어넘어 무관심했다. 히틀러는 엄격한 서류작업보다 순간적인 영감이나 우연히 한 한마디 말이 더 중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안 좋은 의미로 발휘하는 예술가 스타일이었고, 보어만은 히틀러가 혼잣말처럼 하는 한마디 한마디를 모조리 기록했다가 그걸 반영했다. 그리고 야행성이었던 히틀러가 아침에 잠자리에 들면 보어만은 그날 히틀러에게 보고할 일과를 자기 생각대로 요약해서 깨어난 히틀러에게 10분여 내로 요약해서 보고 했기 때문에 히틀러의 정보와 사고마저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히틀러가 그냥 끄덕끄덕이나 '음 좋아.' 한 마디 한 걸 수십 장의 문서로 만들고, 나치당 및 국방군 이하 행정부서에까지 시시콜콜한 지시까지를 내리니 누가 총통인지 모를 지경까지 되었다. 한편 그 와중에도 정적들을 교묘한 수법으로 히틀러에게서 멀어지게 했는데, 가방끈이 짧고 의심이 많은 히틀러를 대신해서 보고서나 언론기사 또는 떠도는 풍문을 "씹고 뜯고 맛본" 다음에 의심 많은 히틀러의 망상에 맞춰 해석 가공하고 예전 행적을 양념 쳐서 파묻어 버리는 재주를 많이 보였다. 덕분에 나치당은 물론 국방군이나 다른 행정부처에서조차 공공의 적이 되었다. 하지만 히틀러의 신임은 여전해서 누가 비판이라도 할라치면 '보어만 까면 체제의 적' 드립을 치니 다들 보어만을 뒤에서나 욕할 뿐이었다. 자신도 이런 처지를 아는지 믿을 건 히틀러의 신임뿐이라 (자신이 그랬던 거처럼 잠시라도 누가 자리를 꿰찰까봐) 휴가도 안 가고 히틀러에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히틀러의 모든 식사자리에 동석하면서 히틀러에게 아첨하기 위해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채식주의자-금주 흉내를 내었지만, 집으로 돌아와서는 몰래 고기와 술을 먹었다고 한다. 악의 성실성이라는 부분이 여지 없이 발휘되는 인물이 보어만인데, 히틀러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 했던 행적에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했던 행적을 포함하면 하루를 48시간으로 살았나라는 의심이 생길 지경이다. 이 때문에 보어만과 관련해서 수시로 나오는 발언들이 보어만이 잠깐의 짜투리 시간만 생기면 토막잠을 잤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봐도 많은 독재자 혹은 그 독재자를 조종하는 실세들은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 사소한 것 하나도 자신이 직접 챙기려다 보니 자연적으로 격무에 시달리는 신세를 자초하게 되는데, 그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히틀러가 전쟁에 신경쓰는 동안 내치는 모두 보어만이 맡아서 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당시의 보어만을 "실질적인 독일의 지도자"로 보기도 한다. 특히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 참패 이후에는 히틀러를 설득하여 정부, 당, 군의 최고 책임자가 참석하는 '3인 위원회'를 만들게 했다. 이 멤버는 정부의 [[한스 라머스]], 군의 [[빌헬름 카이텔]], 당의 보어만으로 이뤄졌다. 라머스와 카이텔은 실권이 하나도 없는 허수아비였으므로, '3인 위원회'는 보어만이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좋은 장치가 되었다. 이 3인위는 보어만의 야심을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보어만과 히틀러 후계자리를 경쟁했던 괴링, 힘러, 괴벨스, 슈페어 등과 보어만의 사이는 더욱 나빠졌다. 그러나 이들은 합심하여 보어만과 대결하지 않았고 자기들끼리도 경계했기에, 보어만의 권력은 점점 더 커져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